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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국내도서
저자 : 일로나 예르거(Ilona Jerger) / 오지원역
출판 : 갈라파고스 2018.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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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산다는 것은"

 

「두 사람 : 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을 읽었던 것은 작년에 취업 면접을 보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였다. 어울리지 않는 빌려입은 양복을 입고 지하철로만 2시간을 이동하게 되었을 때, 한장 한장 넘기며 그들의 삶이 어땠을지 호기심을 풀어 갔다. 당시에 남겼던 감상문은 휴대폰 리셋 과정에서 사라졌고 하나의 문장만이 기억에 남아 제목으로 삼는다.

 

[삶을 산다는 것은]

 

다윈과 마르크스(맑스)는 근대를 연 인물들로 종종 소개된다. - --소개하는 곳에 따라 니체나 프로이트가 추가되며, 마이클 셔머의 경우에는 현재 다윈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흔히 그 두 사람을 「안다 혹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의문이 있다.

 

'당신은 당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부모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포함된 사회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현상의 경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도 흔히 그러하지 않는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 소속에서 잠시 벗어나 집단을 객체화시키고 다른 집단과 비교한다.

 

또한 단순히 텍스트만으로는 텍스트의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다. 텍스트의 안으로 초대받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넘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건 종종 감정과 상상이라는 도구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현실적 경험의 부족을 대체하고 굳게 닫혀 있던 텍스트의 벽을 부수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은 아니다. 허구가 섞여 있는 텍스트이다. 하지만 기존의 텍스트만으로 만났던 그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이 했던 고민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게 해준다. 아마 그건 이 책이 단순한 텍스트(정보)로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인간, 인간의 삶으로써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기]

 

다윈은 연설을 늘어놓는 동안 불규칙하게 박동하던 심장이 점점 안정되는 걸 느꼈기에 더 즐거이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연구가 순수하게 과학의 영역에서 이해되길 바랍니다. 고래를 연구하든 이를 연구하든, 버섯을 분류하든 단세포 생물을 분류하든 전공 분야에 상관없이 모든 자연과학자가 가장 먼저 던져야 할 거대한 질문을 '생명은 어떤 법칙을 따르는가?'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연과학의 방법을 가지고 철학이라든지 심지어 정치를 재단하는 행위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뷔히너 박사*는 최근 개미 집단의 완벽한 노동 체계를 독일 사회 민주주의의 모델로 추천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어쨌든 각자의 관심사를 충족시켜 줄 만한 연구 결과에 굶주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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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요, 다윈은 말했다. 굶주려 있고말고요. 분명---미소 띤 얼굴로 잔을 들어 올리며--- 그 갈증이 대단할 겁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 누군가가 자신의 연구를 오용해 잘못된 방식으로 그런 갈증을 풀도록 좌시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런 종류의 혼선을 참을 수 없었다. 동물은 인간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보다는 동물이 가진 무궁무진한 능력에 감탄하는 쪽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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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을 잃고 삶의 최전방에 앉아있는 그 다운이라는 조그만 마을의 성직자와 그녀가 한 쪽에, 그리고 세 명의 도전적인 무신론자들이 나머지 한 쪽에 있었다. 기독교도로서의 정체성은 이미 오래 전 그가 스스로 버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싶어 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입장을 정말로 표명하기를 원하자, 다윈은 그것을 더없이 명료한 언어로 말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치시킨 그 자리는 수십 년간 끈질기게 고민하여 찾은 자리이므로 결코 불만족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상적인 중간지대에 있다고 할 때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근대 자연과학은 더 이상 종교에 매이지 않아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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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마치 동상이 된 듯 무겁고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추위를 느꼈다. 평소 같으면 벌써 한바탕 말다툼을 벌였을 것이다. 이상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들은 모두 싹 다 쓸어버려야 할 것들이니까. 그는 이상주의자들을 참고 봐 줄 수가 없었다. 특히 사회주의자들 중 그런 부류를 만나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싸우고 논쟁했다... 그가 까닭 없이 모든 것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리고 빌어먹을 헤겔을 역사의 뒷간으로 내던져 버린 것이 아니다. 그의 신조는, 인간의 의식은 그 자신의 존재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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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공산주의적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것을 스스로 금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처음부터 자유를 손에 넣을 수는 없다. 먼저 관계가 뒤집히고, 모든 속박을 벗어던지고, 좋은 삶을 위한 조건들을 회복하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비로소 나머지 것들이 자동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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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삶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저도 조금은 압니다." 다윈이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말했다. "그렇지만 저는 선생님에게 영광스러운 시절이 분명 올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에게서 무심코 한숨이 새어 나온 것은 그때였다.(pp.234~252)

 

두 사람 : 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 / 일로나 예르거 지음 / 오지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8

 

* 루트비히 뷔히너(1824~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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